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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 성공 수기
[미국] 간호사-08 수기 장려
작성자 : 이경신    등록일 : 2008-12-03    조회수 : 96
지금은 12시 45분 한국은 4시 45분이겠구나. 한참 잘 시간이네. 언제부턴가 나는 시계를 볼 때마다 한국시간을 환산하고 나의 가족들이 지금쯤 무엇을 하겠구나 하며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세상이 좋아져 자주 연락을 하고 전화를 통한 음성전달과 video의 전달이 어디 옆에서 감정을 같이 나누며 하는 대화만 하랴. 맨 처음에는 전화로, 또는 메신저로 얼굴보고 통화하는 것만으로 좋았는데, 가끔 힘들고 외로울 때 누군가의 얘기상대가 필요할 때는 훌쩍 날아가버릴까 하는 생각도 한다. 어쩌다가 외국여행도 마다하던 내가 이곳까지 와서 생활하는지 정말 한치 앞도 모르는 게 사람 일이라더니 이건 완전히 나를 표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순간순간이 어렵고 외로웠지만 지나니 정말 화살 같은 세월이 흘렀다.
지난 몇년 전에 일이다. 대학 졸업 후 모두들 선망하던 종합병원에 덜컥 붙은 나는 내과, 정형외과 등에서 4년여의 병원생활을 하던 중, 매일 하루가 같고 아무 미래가 없는 막연함에 사표를 냈다. 2년 후 난 결혼을 해 5년 터울로 딸 둘을 낳고 둘째 아이가 3살이 되었을 즈음 다시 일을 하러 직장을 알아보았다, 솔직히 애들은 나의 손길이 더 필요했지만, 남편이 하는 자영업의 일이 잘 되지 않아 생활이 어려운 형편이었다. 배운 도둑질이 간호사의 일이니 자연히 병원 일을 하고 싶었으나 오랜 공백기간과 나이로 모두들 나의 채용을 꺼려했다. 다행히 그 시절엔 산후 조리원이 한창 이여서 나는 그곳에서 다시 간호사의 일을 다시 하기 시작했고 좀 더 임상에 가까운 일을 하기 위해 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던 어느 날 나와 안면이 있는 한 간호사가 내게 안부전화를 했고, 그는 내게 미국취업을 권했다. 미국의 간호 인력난이 심각하며 그 현상은 10년 안에 해결이 되지 않을 것이고, 그런 이유로 당시 미국으로의 간호사취업이 좋은 조건으로 계속 이루어지니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나를 부추겼다. 내가 너무 늦은 나이가 아닌지 걱정하자, 그는 내게 미국은 일정한 퇴직연령이 없으니40대 초반인 나는 충분한 일할 시간이 있다며 적극 권했고 그런 그의 말은 나의 마음을 움직였다. 실은 전에도 같이 일하던 동료가 미국간호사 자격증 시험(NCLEX)를 공부중인 데 나도 같이 공부할 것을 권한적이 있었으나, 내 자신이 폐쇄적인 사람은 아니었으나 원래 외국에 대한 관심보다 내가 나고, 자란 곳에서 가족들과 왕래하고 사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난 별 관심 없이 그가 말한 것을 무시해 버렸다.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전에 지나칠 수 있었던 주변의 말이 내 귀를 솔깃하게 만들었고 당시 나는 살면서 여러가지 힘든 일들을 겪다 보니, 전에 나 스스로 열심히 살면 언젠가 잘될 것이라며 자신만만하고, 어느 누구도 안 부럽던 생각이 차츰 누그러들기 시작했고. 이렇게 생활비 벌기가 바쁘면 애들 원하는 공부도 맘대로 못 시키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슬슬 나의 노후까지 불투명하고, 내심 나의 미래가 불안까지 했던 시기였다. 며칠의 생각 끝에 일단 학원을 찾아가 공부를 시작해 보기로 했다. 공부하다 앞이 안 보이면 내 지식 쌓은 셈 치자던 공부에 욕심이 생겨 괌에까지 건너가 시험을 치렀고 (당시만 해도 미국간호사 시험을 미국령에서 봐야 했음) 합격이 된 후에는 영어공부를 하기 위해, 고등학교 시절 단과반 학원을 다니던 시절을 떠 올리며 종로 통을 드나들었다. 정말 힘들었지만 새삼 시작한 공부가 재미있었고, 나중에 깨우치는 지식의 세계는 피곤함을 잊게 할 만큼 나를 흥분시켰다. 8시간이 넘는 병원일을 끝낸 후 아침, 저녁 사이 사이로 강의를 듣고 살림까지 했으니 남들이 보기엔 억척이요, 대단하다고들 했지만 사실 내 가족 살리자고 했고, 내가 좋아서 했지, 누가 시키면 그렇게 까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 남편은 반찬투정을 안 하는 사람이고, 아이들도 보통 정도의 머리는 되다 보니 특별한 주의 없이 모든 일상이 잘 돌아가고 있었다. 얼마만의 공부를 했으나 나의 영어는 쉽게 늘지 않았고, 이러다 점점 못 갈 것 같은 두려움과 지금 안 가면 그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은 마음이 교차되어 매 순간이 혼란이었다. 나를 보고 있던 남편이 오히려 고민하지 말고 가라고 부추겼다. 그럴 즈음 산업인력공단 주최 하에 미국간호사취업설명회가 있다는 광고를 접하게 됐다. CALIFORNIA로 가는 두 회사의 설명회를 듣고는 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설명회의 말을 100% 믿지는 않더라도 심한 인력난만으로도 열심히 하면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회사의 간호사 교육 계획과 설명회를 듣고 많은생각끝에 나는 한국의 큰 법률회사와 미국의 staffing company(고용인을 고용주에게 연결해주는 사업)가 같이 일하는 곳을 선택했다. 가려고 마음먹으니 하루라도 빨리 가고 싶었다. 이미 큰애는 중2였으므로 갈 바에는 더 늦추고 싶지 않았다. 난 일하던 직장에 2005년 5월초 사표를 내고 3개월 과정의 intensive 영어수업을 수강했다. 합법적으로 미국으로 입국이 되고 agency의 sponsor에 의해 취업이 되더라도 미국의 규정상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간호사에게는 공인된 영어시험(topic, Ielts)를 통해 그들이 정한 수준의 점수를 받아야만 신분이 안정이 되고 그 점수의 의해 간호직은 영주권을 얻을 수 있는 혜택이 있어서 영어공부는 피할수 없는 기본이자 필수사항이었다. 나는 물론이요 주변의 간호사들이 이로 인해 많은 고생을 했지만. 결국 다들 통과해 지금은 나름대로의 생활을 하고 있다. 다들 마찬가지였겠지만, 영어를 손 뗀지 오래인 내가 영어로 듣고, 쓰고, 말하고, 읽기(독해력)는 너무 어려웠다. 듣고, 읽고 푸는 문제는 점수는 제쳐 놓더라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가지만 말하고, 에세이를 쓰는 것은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래도 독한 마음으로 내가 사는 부천에서 강남까지 주 5일 학원을 다녔다. 말 그대로 9 to 5. 어찌된 일인지 영어는 매일이 제자리걸음 아니면 뒷걸음질 이였다. 그래서 언어배우는 것이 어렵다고 하는지 몰라도.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원하는 수준의 영어실력에 대한 설명에 의하면, 대학강의 수준이나 고급영어 수준이다 보니 그 동안 접하지 않던 단어가 한둘이 아니었다. 다들 알다시피 대한민국 아줌마가 얼마나 영어를 하고 살았겠는가? 읽는 것도 감지덕지인데 표현하지 않고 살던 영어를 그냥 쓰는 것도 아니고 에세이라니, 1개월이 지나면서 영어해 대한 회의가 왔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공부를 시작하며 슬슬 미국 갈 준비도 하던 중이었고, 특히 애들 학교는 3개월과정의 영어집중반이 끝날 때쯤이면, 여름방학 중이라 선생님들 만나기가 어려울 것 같아 서둘러서 방학시작과 동시에 학교서류까지 종결 짓기로 얘기가 끝난 상태였다. “그래 어차피 한 두 달 사이에 영어가 늘면 얼마나 늘까”라는 생각과 맞물려서 간호사취업이 이민쿼터제에 의해 문호가 닫힌다는 얘기가 돌았다, 모든 것이 진행 중이었기에 남편과 아이들은 한달 늦게 오기로 하고 나만 먼저 8월8일 미국 행 비행기를 탔다. 모든 이별이 그렇듯이 온 집안식구들의 배웅과 눈물을 뒤로 하고 난 배낭 하나 짊어진 채 처음으로 긴 비행을 했다. 식구들과의 눈물도 잠시. 영어도 제대로 못하고, 충분치 않은 돈에 아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는 먼 땅에서 펼쳐질 나의 이민생활을 생각하며 막연함에 공황을 겪었다. ‘잘 될 거야. 지금 한 것처럼 열심히만 하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아이들에게, 우리가족에게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나는 나 스스로를 위로 해가며 공황을 극복했고 비행 내내 눈 한번 감지 못하고 LA공항에 내렸다. 한 시간이나 늦게 나온 agency 사장의 도움으로 얻어놓은 아파트에 짐을 풀고 가족과의 연락을 위해 우선 휴대폰을 개통했다. 일주일 후, 현지 staffing company에서의 interview 예정이 잡혔다. 난 휴식 같지않은 휴식에 들어갔다. 살면서 이런 긴 시간의 여유를 갖은 게 처음이었으나, TV, 라디오; 컴퓨터 등의 시설 없이 간신히 개통한 휴대폰을 잘 때도 애인마냥 꼭 옆에 두고, 며칠 전 떠난 고국을 그리워했고 한국에서 하루에 한번씩 오는 전화를 기다리면서 일주일을 보냈다. 기회다 싶어 공부하려 책을 펼쳤으나, 이렇게 이름 없이 지내다 한국에 다시 못 가면 어쩌나 하는 생각과 버려진 것 같은 주위의 냉대함은 나를 우울의 나락으로 밀어냈다. 내 생각에 살고 있는 아파트에 한국간호사들이 꽤 있어서 서로 얘기라도 나눌 줄 알았는데 나보다 먼저 온 간호사들은 먼저 미래에 대한 걱정이 더해 말없음표 그 자체였고, agency 에서 첫 대면했을 때 그들은 고개만 끄덕일 뿐 무표정 그 자체였다. 그만큼 모든 간호사들은 불확실한 앞날에 대해 우울 해하던 시기였다. agency에서의 인터뷰는 일종의 필수과정이었고 곧바로 그곳에서 제공하는 영어수업에 들어갔다. 주 5일간 10시부터 3시까지의 수업이었는데 강사의 계획아래 수업내용은 매일 달랐고, 방향은 갈피를 못 잡았다. 그도 그럴 것이 6,7명의 중국인과 8명 정도의 한국 간호사들은 수준이 제 나름대로였다. 중국간호사들은 발음에 문제는 있었으나, 의사가 자유로운 반면, 한국간호사들은 다들 꿀 먹은 벙어리였으나 수업 받은 것들은 다들 잘 따라가고 있었다. 그러나 나보다 1년 정도 전부터 먼저 온 간호사들의 취업 알선후 계속되는 해고 등으로 agency는 취업은 커녕 빨리 영어실력을 향상시키려는 마음으로 자주 수업 방향에 간섭을 했고 그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으며, 우리는 사무실을 지날 때마다 그들의 눈치를 봐야 했다. 여전히 제자리인 영어실력, 밖으로 나가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늘어야 한다는 생각에 community college도 가보고 큰 교회에서 개방하는 ESL클레스도 기웃거려봤다.Agency의 수업,생활,공부방향등 모든것들이 확실하지않아 혼란스러웠다.원래 계획대로라면 2006년 1월쯤이면 agency에서 제공하는 영어수업도 끝이 날 텐데, 취업의 기회도 주지 않았고. 은행의 잔고는 계속 줄고 있었다. 미국에 오면 매일 햄버거와 빵 등으로 식사를 할 것 같았는데 남들과 비교해 터무니없이 적은 돈을 가져온 나는 돈이 바닥날게 두려워 아이들에게 1달러짜리 햄버거 사주는 것도 꺼려했다. 다행히 캘리포니아는 특히 내가 사는 Orange County 지역엔 한국사람들이 많아 식품을 구하는 게 쉬웠고, 가격도 한국보다 싼 편이라 김치도 사서 먹었다 (시간절약을 위해) 신분이 합법적이다 보니 아이들도 공립학교에 다닐 수 있었고, 어찌 보면 유학 온 사람들에 비해 조건이 좋은 편이었으나 매달 아파트 렌트 비가 $1500(대략 150만원)였으니 앞이 불확실한 우리로서는 1달러 쓸 때마다 마음이 졸여졌다. 다행히 아이들은 그러던 중에도 학교생활을 잘 따라갔고 건강했으며 그것이 나의 유일한 기쁨인 시절이었다. 그때쯤 진행 되던 취업이민서류가 빨리 진행되어 예전 같으면 오지도 않던 영어시험점수를 내라는 편지가 우리에게 하나 둘 오기 시작했다. 나 역시, 10월 20일 까지 visa certification (미국에서 원하는 영어시험을 합격 후, 그 점수를 외국인으로서 의료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관리하는 곳 (ICHP)에 보내면 그곳에서 발행하는 일종의 서류로, 이 절차를 꼭 밟아야 영주권을 취득 할 수 있다)을 내라는 편지를 받았다. IELTS가 어떤 시험인지는 알겠으나 너무 감당하기 어려워 2월에 한번 치러본 것이 전부요. 조금 더 준비를 한 후에 보려고 했는데 이런 편지를 봤다니. 그래도 다행인 것은 적당한 사람을 찾지 못하고 영어에 골머리를 썩히던 중. Agency의 한국인 사장이 외부에서 한국인 영어강사를 초빙해 우리에게 소개를 해주었고, 그때쯤 우린 한국말로 배워왔던 방식대로 일주일에 2번씩 수업을 받던 중이어서 시험에 대한 눈은 뜬 상태였다 내가 생각해도 한국인들은 참 놀랍다. 끝까지 좌절하지 않는 힘이 있다. 그와 때를 같이 해서 일부 간호사들의 남편들이 IELTS공략의 방법으로 시험경향 분석에 들어갔고, 미국인에게 생소했던 영국식영어인 IELTS가 TOFEL보다 선호 되면서 여러 곳에서 시험이 치러졌다. 그뿐인가 다들 같은 배를 탄 외국간호사들은 정보공유겸, 시험 후 넋두리 겸 후기를 열심히 on line에 올렸고. 그것을 바탕으로 남편들은 시험경향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특히 많은 간호사들이 정보에 의한 토픽으로 제일 취약부분인 쓰기와 말하기 tutoring(개인교습)을 받으며 1달에 2번씩 치러지는 시험을 4~8개씩 예약을 하면서 IELTS 공략에 들어갔다.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다들 예민한 상태였고 시험에 실패하면 가족들의 신분이 불법이 된다는 생각에 눈에 불을 켰으며 힘들고 지쳐 밥을 먹기도 어려웠다. 물만 부으면 되는 국수와 라면을 두 개 싸 들고. 9시부터 5,시까지 도서관에 박혀서 난 에세이 쓰기에 매진했다. 국수는 불으니 목으로 넘길만했다. 어떤 간호사는 입으로 넘기는 게 어려워 물만 먹는다고 했다. 남들이 잘 쓴 폼을 외워서도 써보고, 읽고 ,또 읽다 보니 문장을 어떻게 써야 할지 감이 잡혔다. 주위의 간호사들이 앞다투어 tutoring을 보조 받으며 하나 둘씩 합격소식을 알렸지만, 난 여유가 없어 엄두도 못 내던 중, 나의 절친한 친구가 생일축하전화를 해왔다. 도서실에서 공부하다가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던 중. 내 얘기를 듣던 친구가 대뜸 “내가 돈 보내줄 테니 tutoring을 받으라고 했다. 너무 급한 마음에 난 친구의 제의를 받아들였고, tutoring을 시작한지 한달 만에 나도 남들처럼 합격했다. 시험에 대한 얘기를 하자면, 시험시작 전 그날의 speaking 시험관이 발표되는데, 내경우엔 센터에서는 점수 안주기로 유명한 사람이 걸렸다. 마음이 아팠으나 다 잊고 시험에 매진했고, speaking 시험 전에도 전형료가 아까우니 practice나 열심히 해보자 라는 생각으로 생소한 topic을 가지고 즐겁게 떠들었다. 듣기,읽기,쓰기등 너무 잘 본 시험이었는데 speaking 시험관 때문에 안될 것 같은 생각에 3일 동한 공부를 다시 시작 못하고 울면서 지냈다. 끝이 안 보이는 시기였다. 포기했던 시험이었는데 의외로 합격으로 난 너무 기뻤고 한국에 소식을 전하며 엉엉 울었다. 너무 기쁜 순간이었으나 다음의 어려움들이 줄지어 나를 기다렸다. IELTS의 시험점수가 ICHP로 가지 않아 나는 마감일을 손꼽으며 매일 센터로 재촉전화를 했고 급기야는 급행료까지 지불했다. 조금 더 여유가 있으면 비행기를 타고 갔다 줬으면 했으나 여전히 가난한 나는 마음만 졸였다. 나중에는 IELTS 센터에서는 보냈는데 ICHP에서는 못 받았다고 해서 그 다음부터 ICHP로 매일 전화를 했다. 정말 미국은 특이한 나라다. 한국의 경우는 모든 서류들이 순서대로 진행되어 언제쯤이라는 추측이 가능한데 미국은 그렇지가 않고 순서가 바뀌는 건 일반 얘기고 누가 서류를 보느냐에 따라 서류진행의 속도를 알 수 있는것은. 물론이요, 진행이 쉽게 될수도 어렵게 될수도 있다. 모든 노력에도 불구에도 난 visa certification을 제때에 받지 못했고. Due date 전에 서류를 보내야 했기에 마지막까지 우체통을 지켰다. Visa certification 없이 점수만이 있는 미완성된 서류를 보냈다.불행하게도 서류보낸 30분후쯤 우체부는 우리 집 우체통에 visa certification을 넣어놨다. 정말 기막힌 일이었다. 덕분에 난 없는 여유에 돈을 들여 내 입장을 appeal하는 motion3라는 신청을 해야 했다. 나의 신분은 pending 으로 돌아갔다. 이제 직업을 잡아야겠구나 하는 중에 돈이 바닥이 났고 미국에서의 근무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nursing home 적응이 먼저일 것 같다는 생각에 여러 nursing home을 다니며 application을 넣었다 .때 마침 산업인력공단에서 해외취업자에게 지급하는 보조금 $4000가 왔고 그것은 한여름 극심한 가뭄끝의 단비였다. 일주일이 지난 후 한곳에서 연락이 왔고 DON(한국으로 말하면 간호과장)과 인터뷰 후 난 미국에서의 첫 일을 2006년 11월6일 시작했다. 맨 처음에는 일을 한다는 것과 돈을 벌 수 있다는 것만으로 좋았다 그러나 nursing home일은 나를 지치게 했다. 30분간의 break time은 몰론 저녁 한번 못 먹고 일을 했고 급기야 나는 자주 아팠다 (요통으로) 병원으로 가고 싶었으나 엄두가 나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던 중. 아는 간호사의 소개로 지금 일하는 곳에 application을 넣었다. 난 원래 내과, 외과 일을 했으나 자리가 없어 nursing home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에 자리가 있는 정신과 인터뷰를 했다. Unit manager, Julie는 초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대했고 나의 별것 아닌 경력에 만족해 했다. (한국에서의 노인병원 경력과 미국에서의 nursing home 경험은 내가 정신과에서 일하기에 충분했고 특히 내과, 외과 경력을 좋은 바탕이라고 했다) 2007년 8월 20일 난 nursing home을 그만두고 병원 일을 시작했다. 아직도 영어가 능숙 치 않고 어려워 매 순간 말하기가 어려워 불안하지만 순간마다 “오늘도 무사히, 순간을 무사히”를 기도하며 지냈다. 다행이 100% 라고 할 수 없지만 대다수의 동료들이 나를 좋아하고 나의 도움요청에 흔쾌히 응해 주어 해 볼만하다. 쉽게 NO 라고 하지 못해 남보다 많이 움직이고, 언어의 장벽으로 많이 웃다 보니 “happy face” 별명도 얻었다.

미국엔 생각보다 많은 필리핀간호사가 있으며, 직장도 예외 없이 “Melting Pot”이다. 나도 이국인지만 아프리칸, 멕시칸, 필리핀, 중남미, 인도, 파키스탄인, 흑인 정말 많은 인종이 일을 하며 저마다 발음, 억양이 틀리다. 특히 흑인들의 말은 노래를 하는 듯 운율을 타 듣기는 어렵지만 재미있다. 난 지금 1년 넘게 이곳에서 일을 하고 있으며, 2달 전부터는 12시간씩 근무하는 병원 full time일 외에, 늘어난 지출(집 구입)과 미래를 위해 part time (가정방문 간호사)도 시작했다 매달 벌어 생활하기가 바쁜중에 1년전부터는 약간의 저축을 시작했고 얼마전 집도 샀다. (아직 이사를 가진 않았지만) . 막연함과 노력하겠다는 다짐만으로 시작한 미국 행이 1년 만에 영주권 시험 (IELTS)에 통과하고, 2 년 만에 다들 복권당첨과 같다는 영주권을 손에 쥐었으며, 3년이 된 지금 집을 장만 했으니 이만하면 성공한 삶이 아닌가? 말이 쉬운 1, 2 년이지 다시 가고싶지 않은 그 세월이 내겐 큰 시련이요, 아픔이었지만, 그 세월을 간과할 수 없음을 난 안다. 40代 중반의 나이에 미국에 와서 다시 시작한 나의 삶을 난 후회하지 않는다. 가끔 광활한 도로를 달리며 한국에 대한 그리움과는 별개로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때도 있지만. 생각만으로도 눈물이 나는 2년 전의 삶들이 나의 밑거름이 되었으니, 난 그 세월을 잊지 않으련다.. 지금도 우리 가족은 그때의 일들을 떠올리며 자주 얘기한다. . 그리고 아이들도, 남편도 그때의 아픔을 간직하고 아낀다. 그 동안 한창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많은 나이에 힘들게 참아준 나의 딸 지은아, 지현아 잘 참았다. 우리 이제부터 행복의 시간을 만끽하자.. 그리고 항상 나를 도와주는 동료에게도 감사하다. 그들이 없이는 나의 존재가 있을 수 없다는 걸을 알기에……..그리고 내가 가진 능력보다 더 한 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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