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17년이 흘렀다. 지난 8월 초 파키스탄에서 사상 최대 홍수가 나 2000여명이 숨지고 1000만여명이 이재민이 됐다. 이탈리아 로마의 유엔 세계식량기구(WFP) 본부에 비상이 걸렸다. 현지에 연락해 사정을 파악하고 헬기를 투입해 구호 식량을 전달했다. WFP 본부는 초대형 재난이 발생했을 때 대처하는 매뉴얼에 따라 식량 공급과 지원 계획을 신속히 추진한다. 이 파키스탄 구호 프로젝트의 중심에 17년 전 그 젊은이가 있었다.
- ▲ 임형준씨가 2004년 6월 서아프리카 기니비사우 남부 가부(Gubu)지역 한 시골 마을에서 식량지원 업무를 수행하던 도중 마을 어린이들과 어울리고 있다. /임형준씨 제공
그는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며 대학(한국외대 루마니아어과) 시절 80여 개국을 돌아다녔다. 아프리카를 종단하며 내전·가난·질병에 시달리는 난민들의 처참한 모습도 봤다. 그는 "오지 여행을 다니며 정말 어렵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가슴에 새기고 이들을 돕겠다는 다짐을 주문처럼 외고 다녔다"고 했다.
1998년 7월부터 두 달은 유엔개발계획(UNDP)이 진행하는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의 집시 빈민가 숙소 건설에 NGO 자원봉사자로, 1999년 9월부터 석 달 동안은 알바니아에서 코소보 난민들 총기 회수 프로젝트에 인턴으로 참가했다.
대학원을 졸업한 임씨는 2001년 외교통상부 제5기 JPO(Junior Professional Officer·국제기구초급전문가)에 선발돼 2년 반 동안 중미 온두라스 오지의 식량공급 업무를 맡았다. 차량이 50m 벼랑으로 굴러 중상을 입기도 했다. 이후 유엔 정직원이 됐지만 안주하지 않았다. 2004년 4월부터 2년간은 전기도 없는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인 서아프리카 기니비사우로 달려가 150만명의 국민 중 30만~40만명에게 식량을 공급하는 프로젝트 책임자로 활약했다. 이어 2006년 6월부터 라오스 근무를 지원했다. 베트남전 당시 라오스와 베트남 국경에 미군 융단폭격으로 뿌려졌던 폭탄 중 불발탄을 제거하고, 농경지와 도로를 조성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험난한 현장만 누비던 그는 보다 체계적으로 배워 현장에 적용하고 싶었다. 2008년 6월부터 1년간 미국하버드 케네디스쿨에서 공공행정학 석사 과정을 밟은 이유다.
그는 "지구 상에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식량이 충분하다. 이를 나눌 간절한 의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